진먼의 역사는 서기 317년, 진원제 건무 원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명나라 왕조는 해적의 침입을 막고 거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천호소성(千戶所城)’이라는 성을 축조하였습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정성공이 청나라 왕조에 군사 대응을 하던 시기에 진먼은 매우 중요한 소도시였습니다. 서기 1680년 청나라 강희제 19년.대원수 진용(陳龍)이 허우푸(後浦, 진먼청의 옛 명칭)로 총사령부를 이전한 것을 계기로 진먼청은 차츰 몰락하였습니다. 진먼청의 동서남북에는 예로부터 “사람을 찾노라면 동쪽 성문, 돈을 버노라면 서쪽, 사업을 확장을 원한다면 남쪽 성문 밖으로, 공직에 오르고자 한다면 북쪽 성문 밖으로”라는 속담처럼 총 4개의 성문이 있습니다. 이러한 속담이 생기게 된 연유는 당시 진먼청의 동쪽 성문이 인구가 밀집된 구강(古崗)과 인접했기 때문이며, 서쪽에 있는 쉐이터우에는 화교 상인들이 밀집해 있어 돈을 많이 벌 기회가 있었고 남문밖에는 항구가 있어 상업이 번성하였던 데다가 북문은 옌난산 옌난 서원이 있어 공직에 나서고자 한다면 응당 그곳에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진먼청의 네 구석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새로운 성문루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중 남문은 진먼 주류 공장의 입구이며, 북문 옆에는 명나라 때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질박함을 자랑하는 옛거리 스반가가 있어 방문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밍이 라오제 더 보기>>>>